차석용 휴젤 명예회장(73)은 40년 넘는 직장생활 가운데 28년 동안 여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내 ‘직업이 CEO’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1999년 한국P&G를 네 명으로 출범시켜 2년이 채 되기 전에 흑자 달성과 함께 시장점유율 1위를 이끌었고, 해태제과에서는 무너진 조직을 추슬러 경영 정상화를 이뤄냈습니다. 2004년 12월부터는 18년 동안 LG생활건강을 이끌며 매출을 9배(영업이익 22배) 키웠고, 65분기 연속 영업이익 증가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어떤 업종과 규모의 기업에서건 놀랄만한 성장을 일궈내 ‘차석용 매직(magic: 요술)’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런 차 회장이 최근 펴낸 책 <하심: 내 삶에 내렸던 아름다운 소나기들(열린책들 펴냄)>을 통해 그 ‘비결’을 털어놨습니다. “그 기록들을 만든 것은 화려한 경영이론이 아니라 위기일수록 낮게, 성공할수록 멀리 보는 태도였다.”
그가 책 제목으로 삼은 ‘하심(下心: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은 그의 첫 직장생활에서 겪은 좌절이 안겨준 평생의 선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대학 학·석사를 마치고 서른두 살에 들어간 첫 직장 프록터 앤드 갬블(P&G) 본사에서 신입사원 교육이 끝나갈 무렵, 미국인 동기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에 약해 보여. 미국식 소통방식에 서툴고, 발표도 충분히 준비된 것 같지 않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뉴욕주립대(회계학 학사)와 코넬대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실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왔지만, 동료의 평가를 부정하는 대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나는 타고난 것이 부족하니, 노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태도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힘을 키워줬습니다. “P&G 시절 뉴욕 스태튼아일랜드 공장에서의 일이다. 본사가 인건비와 세금, 운영비 부담을 이유로 오래된 공장을 옮기려고 했지만 노조의 거센 반대로 수년째 제자리였다.” 매일 생산라인을 돌던 그는 세제에 향을 뿌리는 스프레이건 다섯 개 중 하나가 심하게 구부러져 제대로 분사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라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알고 보니 직원들이 가장 비싼 원재료 중 하나인 향수를 일부러 덜 넣고 있었습니다. 원가를 낮춰 ‘이 공장은 생각만큼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봤으면 단순한 품질 문제로 보였을 일이, 눈높이를 낮추자 공장 폐쇄를 막으려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였습니다. “대안 없이 몰아붙이면 사람은 살아남을 방법부터 찾는다는 깨달음을 새겼다.”
이 깨달음은 해태제과의 경영 구원투수를 맡았을 때 빛을 발했습니다. 출근 첫날 그가 발견한 것은 회사의 나쁜 실적보다 먼저 무너진 임직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회의실을 벗어나 직원들을 만나고 회사 뒤편 삼겹살집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에게는 훌륭한 브랜드들이 있습니다”는 말로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살렸습니다. “이후 호두마루와 구운감자, 오사츠가 잇따라 성과를 내며 회사가 정상화됐다.”
“잘 될 때, 가장 먼저 위기를 보라.” 그가 늘 새기는 말입니다. “성과에 취하지 않고, 최악의 순간을 미리 준비하며, 결정한 뒤에는 끝까지 책임진다.” ‘정답은 없어도 기준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의 경영모토입니다.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가. 누구와 함께 해야 하는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위기 앞에서 무엇부터 지켜야 하는가.” 이런 기준들이 ‘차석용 신화’의 밑바탕이 됐습니다. “조직에서는 직급이나 영향력보다 사실과 논리가 더 큰 권위를 가져야 하며, 명확한 원칙은 판단을 늦추는 제약이 아니라 빠른 결정을 돕는 나침반이다.”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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